기도합시다.


모든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언제나 한결같은 사랑과 무한한 자비로 저희를 보살펴 주시는 하느님 아버지, 감사와 찬미 흠숭 드리며 영광 받으시옵소서. 그리고 저희의 구원을 위해 몸소 당신의 생명마저 버리신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 감사와 찬미 영광 드립니다. 당신을 저희들의 마음 안에 모시고 당신과 하나 되고 싶사오니 성경을 통해 주신 당신의 말씀들을 그대로 따르고  실천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될 수 있도록 은총 베풀어 주시옵소서. 언제나 저희들을 성부와 예수님께 인도하시고 이끌어 주시는 성령님, 이 작은 홈페이지를 방문하는 한사람 한사람에게 당신의 빛을 비추시어 진리의 말씀들을 저희들이 깨닫는데 힘이 되어 주시옵소서. 참 좋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미국의 유명한 소설가 마크 트웨인 (Mark Twain)은 고백하기를 성경말씀이 어려워 자신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구절들이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잘 이해하면서도 실천을 못하는 것이 가장 괴롭다고 했답니다.   하느님께로 가까이 가려 하는 우리자신들은 어떨까요?  사도 성 바오로가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라고 필립보 신자들에게 부탁 했듯이, 바로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닮음이야말로 말씀들을 실천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라 생각 됩니다. 

    


“무슨일이든 이기심이나 허영심으로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낮게 여기십시오. 저마다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아 주십시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시지 않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위의 성경말씀은 필립보서 2장 5절 -11절의 말씀입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여러 면에서 볼 때 사도 바오로가 쓴 서간경 중 우리의 마음을 감동케 하는 예수님에 관해 가장 잘 설명한 구절이며 또한 신약성경의 성경학적 논리 궁극적 목표를 가장 잘 대변하는 말씀들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삶 전체는 겸손과 순명 그리고 자아포기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위에 군림 하시지 않고 오히려 섬기셨으며, 당신 자신의 뜻대로 하시기 원치 않으시고 오로지 하느님의 뜻만을 추구하셨고, 우리의 구속을 위해 당신의 영광을 모두 버리셨습니다.


성경말씀 여러 군데서도 (마태 23:12, 누가 14:11, 18:14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 오로지 자신을 낮추고 겸손한 자만이 높여질 것이라고 하셨듯이 이 겸손이 바로 모든 덕행의 근본이며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지니기 위한 초석임을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겸손은 아주 잘못 이해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서 생기는 필요성으로 인한 자신을 낮춤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종속을 존경과 복종이라는 외적인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을 겸손으로 규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입니다.   비록 자신의 생각과 마음은 외부적으로 나타내야 하는 태도와 일치하지 않는다 해도 사회적 풍습이나 제도로 인해 몸에 배일 수도 있는 이러한 겸손을 ‘외적인 겸손’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외적인 겸손은 항상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나타내야하는 것이지 위 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이를 보인다면 우습게 보이거나 조롱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지배계층에 있는 사람들에겐 자만과 자기만족 그리고 아래계층의 사람들에 대한 경멸 등이 팽배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사전에서도 겸손은 ‘다른 사람 앞에서 자기자신을 낮춤’이라고 정의 하는데 외적인 규칙이나 사회제도에 따라 자기 자신을 낮춤을 외적으로 표시하면 이 세상은 그 사람이 겸손하다고 일겉습니다.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겸손 즉 외적인 겸손과는 달리 참된 의미의 겸손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의 덕행입니다. 사실 이 덕행은 많은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소홀히 여겨지고 잊혀져가고 있으며 이 덕행을 실천하려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의 한축인 이 겸손은 하느님께서 보시기에는 가장 근본적인 덕행이라고 합니다.


마태복음11장 29절 말씀처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라고 예수님께서 부탁하십니다. 성 프란시스코 살레시오는 ‘복음의 본질이 이 한 구절에 다 있다’라고 할 만큼 겸손은 모든 덕행의 그리고 예수님 마음을 닮는데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살레시오 성인이 나열하신 참된 의미의 겸손의 단계에 관해  알아보도록 합니다. 


성인은 완전한 겸손을 달성하는데 5가지의 단계가 있다고 하십니다.


겸손의 제 1 단계 - 우리 자신을 아는 것


우리자신을 잘 알기 위한 방법에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제 생각으로 제일 효과적인 것은 바로 양심성찰이라고 생각됩니다.  홈페이지 기도서에 있는 양심성찰이나 특수성찰을 조목조목 진지하게 성찰해보면 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내 마음의 거울 안에 나를 보듯 나의 참모습을 발견하게 되리라 확신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나 자신을 내가 발견하고 아는 것은 괜찮지만 다른 사람이 이를 지적해 주거나 나를 그런 사람으로 본다면 나는  그다지 마음이 편치 않고 심히 유감스런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성인은 우리가 이 단계에서 머무를 것이 아니라 다음의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고 합니다.



겸손의 제 2 단계 - 자기를 인정 하는 것


우리가 우리자신을 아는 것과 그런 우리자신을 인정하는 것은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인정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그같이 (양심성찰로 알아낸 나 자신) 보았을 때 마음의 요동 없이 또한 조금의 유감의 마음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때야 비로소 바로 자기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성인을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과연 자신을 이렇게 인정하는데 가장 큰 도움이 되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나신의 무가치함과 비천함을 깨닫는 것이라고 성인은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왜 비참할까요? 세례 받을 때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은총과 우리가 드린 약속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되리라 생각됩니다. 세례로 새로 거듭났던 나 자신과, 세월이 지나며 저지른 죄들로 인해, 양심성찰로 비추어진 지금의 나 자신을 비교해보면 처참할 정도로 많은 차이가 있음을 저는 고백합니다. 마치 처음엔 티 없는 하얀 천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던 나 자신이 시간이 지나면서 여기저기서 넘어지고 부딪치고 해서 순백함이 사라지고 더러움으로 가득한 그 옷을 입고 있는 나를 생각하면 내가 왜 비참하고 무가치 한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겸손의 제 3 단계 -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무가치함과 비천함을

알아보았을 때 그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


우리자신이 이러한 우리처지를 느끼고 또 우리가 그러하다고 말 할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이 우리를 앞질러 일러주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또 이를 좋아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화를 낼지도 모릅니다. 이는 모두 우리의 겸손이 완전하지 못함의 참된 표시라고 성인은 말씀하십니다. ‘당신 말씀이 맞군요. 그리고 속속들이 저를 잘 알고 계십니다’ 라고 솔직하게 고백할 수 있도록 실천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모든 은총과 내가 그 분 앞에서 저지른 모든 죄를 비교하면서 나 자신의 비참함을 깨닫고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또 예수님의 마음을 닮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이 단계를 실행에 옮길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겸손의 제 4 단계 - 멸시받는 것을 좋아하고 누가 우리를 헐고 깎아내릴때

이를 좋아하는 것


누가 우리를 멸시하고 헐뜯고 깍아내릴 때 일어나는 마음의 동요는 양심성찰 항목 하나하나에 비추어 성찰하여 보면 그러한 마음의 동요의 원인처를 찾을 수 있습니다.  또 이로써 나자신을 다시 알게해주고 이를 내가 인정함으로써 이를 발전의 기회로 삼을 수 있기 때문에 즉 예수님의 마음과 같은 완전한 겸손의 덕을 닦는데 도움이 되는 원인제공이 되므로 우리가 이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겸손의 제 5 단계 - 경멸당하는 것을 좋아할 뿐 아니라 그것을 원하고 받으려고 찾으며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거기에서 만족을 느끼는 것


성인께선 이 단계가 겸손의 모든 단계 중에서 가장 완전한 단계이며 이 단계에 도달하는 사람들은 매우 행복한 사람들이지만 그 수효는 매우 적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잠시 콘셉션 데 아르메다 (Conceptcion de Armida)를 통해주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겠습니다.

‘겸손은 모든 덕들의 토대이며 기초요 소금이며 생명이다. 또 무엇이나 자랄 수 있는 흙이요 땅을 기름지게 해주는 물이요 성장케 해주고 재생케 하는 생명이다. 겸손 없이는 순명이나 청빈이 있을 수 없으며 쓰러지지 않는 순결함도 있을 수 없다. 모든 덕들의 어머니인 겸손의 토대 없이는 이런 보석들을 내가 내려주지 않는다. ’

‘겸손은 영혼의 모든 움직임과 모든 깨끗한 행위의 생명이다.’

‘성령께서는 다만 이 겸손위에만 성령의 은사의 진주를 쏟아 주시고 또한 겸손과만 함께 영혼들 안에서 역사하시는데 그 영혼을 완전히 당신 것으로 만드실 때까지 그치지 않고 계속 대화 하시면서 역사하신다.’


‘겸손이 없는 곳에는 나도 있지 않다.’


위의 말씀처럼 모든 덕행의 가장 근본이 겸손이요 이 없이는 다른 덕행을 쌓는 데로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성령께서도 역사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더군다나 이 겸손이 없으면 예수님께서 저희와 같이 계실 수 없다고 분명히 일러주십니다. 


필립보 성경구절 말씀대로 예수님마음의 초석은 겸손입니다.  이 완전한 겸손의 덕행을 성취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살레시오 성인은 완전한 순결보다도 더 드문 것이 바로 이 겸손이라 했습니다.


17세기 프랑스의 위대하고 이름 높은 주교였고 문필가였던 보쉬에 주교는 그 유명했던 뽀르 르와왈 수녀원의 수녀들에 대해 이런 말로 비유했다 합니다. ‘수녀들은 천사들과 같이 순결하고 마귀들과 같이 교만하다.’ 라고요. 

그 수녀들은 ‘모든 것’을 배웠고 ‘모든 것’을 실천하였고 예수님의 제자와 정배가 되었지만 그들의 정신과 마음과 생활 속에 당신의 가장 긴급한 부탁중의 하나이며 명령이었던 ‘내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에게 배워라.’ 하신 말씀을 소홀이 하였던 겁니다.


우리도 위선적인 제자가 되어 예수님 혼자서 당신의 말씀을 공허하게 외치시게 하는 건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쉬운 예로 우리는 웬만해선 배고프지 않으려 끼니를 거르지 않듯이 하루 일과 중 우리자신이 겸손의 덕행으로부터 멀어지지 않도록 자주자주 성찰해보고 과연 내 자신이 겸손의 다섯 단계에 어디쯤 와있는지, 또한 각 단계를 얼마나 잘 실천하고 있는지 자주 묵상하고 성찰해보는 것도 겸손의 덕행을 소홀치 않게 하는 좋은 방법이며, 완전한 겸손 즉 예수님의 마음을 닮는 데로 우리를 성장시키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필리보서 말씀처럼 사도 성 바오로는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 안에 간직하라고 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마음, 겸손, 순종, 자아포기를 예수님처럼 그대로 간직하는 것이야 말로 바로 우리가 부단히 노력하고 추구하는 성화와 정화의 길의 목적지라고 생각되며 그러한 예수님으로 인해 하느님께서 모든 영광을 받으셨듯이 우리도 열심히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고 간직하기 위해 그 기본인 ‘겸손’부터 소홀히 하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