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0월강의

기도합시다.
거룩하신 천주 성삼이시여, 우주의 창조주 하느님이시여, 그동안 우주에 내려주신 당신의 무한하신 자비와 사랑과 은총에 감사와 영광 드립니다. 영원무궁토록 당신의 피조물로부터 흠숭과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오늘도 보잘 것 없는 이 작은 홈페이지를 예수성심과 성모성심께 봉헌하오니, 성령의 힘으로 온전히 맡으시어, 주관하시고 하느님의 뜻을 많은 영혼들 안에서 완전히 이루시고, 이 작은 작업소를 통하여 많은 영혼들 안에서 깊은 회개와 성화의 불꽃이 타 오르게 하옵소서. 특히 이 홈페이지의 회원들과 가족들과 접속하는 모든 이들을 성모성심께 봉헌하오니 천상의 어머니 저희를 당신 품에 안으시고 천국으로 이끌어 주시고 보호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이 달에는 김 정수 신부님의 좋은 강론 말씀을 들어보겠습니다.  

거룩한 변모 축일     주님을 뵈올 수 있는 우리              06. 8. 6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연세가 드신 분들은 세상을 살아오며 여러 가지 체험을 하셨으니 세상살이도 별 것 없다고 많이 생각하시리라 여깁니다. 전도서인 코헬렛에는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코헬 1,2)라고 하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말 세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곳일까요? 사실 허무하기만 하다면 여러분이 성당에 나오실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새로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오늘 들려주시는 주님의 말씀에서 그 답을 찾아봅시다.

오늘 제1독서는 다니엘 예언서의 말씀인데 다니엘 예언서의 가장 중심이 되는 계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다니엘 예언자는 유대 민족의 전통과 하느님께 대한 돈독한 신앙을 그대로 간직하기 위해 갖은 박해와 혹독한 시련을 겪으며 성장해갔습니다. 궁중에서 제공하는 술과 음식 대신에 채소와 물만 마시는 삶을 살았고 이런 절제와 극기 생활이 자신을 굉장히 정화하는 생활이 되어서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지혜에 능통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꿈과 환시를 꿰뚫어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하는데 오늘의 표현을 빌리면 상당히 영성적인 분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이분의 수행이 인간의 심성을 포함하는 표징들 즉 꿈, 감수성, 감각 등을 꿰뚫어 볼 줄 아는 혜안을 갖게 한 것입니다. 혜안이란 하느님의 영적인 현존을 탁월하게 해석할 수 있는 눈을 말합니다. 그로인해 우리는 참된 예언자의 모습을 이분에게서 보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역사와 온 우주를 지배하는 분으로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다니 7,14)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의 말씀은 주님의 변모에 대하여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가는 확고한 연결점이 되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일관성 있게 하느님의 변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제2독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성서의 예언과 사도들의 증언이 같은 수준으로 취급되고 둘 다 똑같이 확고한 신앙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이로써 우리에게는 예언자들의 말씀이 더욱 확실해졌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날이 밝아오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어둠 속에서 비치는 불빛을 바라보듯이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습니다.”(2베드 1,19). 사도들이 제시하는 복음 선포는 “교묘하게 꾸며낸 신화를 따라 한 것이 아니라”(2베드 1,16) 사도들의 증언과 성령의 감도를 받은 예언자들의 말씀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으로 우리도 거룩한 그분과 함께 세상에 살면서 그런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고 충실히 따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타볼 산에서 평소의 예수님 모습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는 변모된 모습을 드러내신 마르코 복음서 말씀입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은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의 모습은 제자들에게 평범한 인간의 모습이었지만 빛나는 모습으로 바뀌었을 때 그것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정신이 나갔다는 것입니다. 세 초막을 지어서 하나는 예수님께, 하나는 모세에게, 하나는 엘리야에게 드렸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마르 9,6)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가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마르 9,9)고 하는데 그들은 그 말씀을 잘 지켰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그런 모습을 보였으며 또 그 모습이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일까요?

예수님께서 새하얗게 빛나시던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하고 나누었다.”(마르 9,4)고 하시는데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루카 복음에는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루카 9,31)라고 자세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영광스런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어떻게 돌아가실 것인가를 이야기했다고 하였습니다. 높은 산에서 예수님께서 참 모습을 드러내실 때 고통과 죽음에 대해서 하신 말씀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인간이 고통을 당하거나 죽으면 끝이고 비참하다고 생각하는데 예수님께서는 타볼산에서 당신의 모습을 바꿈으로써 고통과 죽음이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순간이라고 예시해 주신 겁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인간이 생각하는 습관이나 역사를 완전히 뒤바꾸신 것입니다. 이제는 고통이나 죽음이 득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또 그 순간이 우리에게 슬픔과 고뇌의 순간이 아니라 “이제는 오히려 영원한 영광의 순간이다.”라고 우리에게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1) 오늘 복음 말씀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점이 적지 않습니다. 제자들의 기억과 증언 등이 영성의 감도를 이해하는데 상당 부분 필요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신비를 관상하고 느끼도록 우리를 초대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복음적 토대가 예수님과 세 제자의 특별한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본질적인 것을 파악해보면 예수님의 변모의 신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빛나는 얼굴을 봤다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하게 합니다. 주님의 아름다운 모습을 제자들이 뵈었다는 것이 변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변모가 가능함을 오늘 말씀에서 보여 주십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할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때 묻지 않고 깨끗한 수행자의 모습으로 변모하게 됩니다. 기도 생활에서 주님께 나아가며 기도하는 사람이 주님의 본래 모습을 볼 줄 알게끔 변하게 됩니다. 기도는 인간의 내면생활을 변형시킬 뿐 아니라 외모까지도 아름답게 변모시키는 원천입니다. 기도를 통한 내면의 변모를 통해서 외모까지도 확실히 아름답게 변모되는 것입니다. 그분과의 대면으로, 관상으로 인해서 우리 자신의 모습이 변해서 그분을 뵙게 되는 것입니다. 빛나는 얼굴은 기도생활을 열심히 하는 신앙인들에게 주는 열매를 말하며 바로 인간의 변모를 뜻합니다. 그것이 타볼산의 변모의 결과라고 여기면 됩니다. 우리가 정화되어 나갈 때 육체적인 것은 물론이고 정신적인 것, 감각적인 것을 지나면서 영적인 수준으로 변모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신데 그분이 변하시기 보다는 그분을 볼 수 있도록 사람이 변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깨끗하면 하느님을 뵐 수 있습니다(마태 5,8 참조). 변모가 바로 관상생활이고 봉헌생활입니다. 봉헌생활이란 하느님께 영광 드리는 것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져도 상관이 없을 정도의 준비가 된 것을 말합니다. 비천한 인간이 예수님과 친교를 누리는 신성성을 받아들여서 혜안이 생기고 통찰력이 생겨서 그분과 함께 십자가를 질 수 있고 그런 가운데 다른 사람이 보면 변모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2) 또한 예수님의 변모를 보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 생활입니다. 기도를 할 때는 양적인 것뿐 아니라 질적인 것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기도 생활의 순서를 바르게 해나갈 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변모하게 되고 그 변모는 다른 뜻이 아니라 정말 거룩하게 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관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관조란 사람에게 있어서는 잘 누리는 것인데 좋은 것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아프더라도 잘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밀 씨가 떨어져 수백 배, 수천 배가 되듯이 우리의 모습도 외적인 것이나 내적인 것이 다 함께 변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기도하게 되면 순수하고 깨끗하게 되어 자연히 하느님과 통교하게 되고 통교된 기도는 하느님께서 충실히 들어주시게 됩니다. 그러면 인간에게 내재된 감수성을 느끼고 인식도 자라나 성숙하게 되면 세상에서 많은 것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도 이 세상에 살면서 하느님을 체험하는 변모를 누리게 됩니다.

  3) 그러나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를 보고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는 충격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이 세상에서 축복을 받아 가문이 번성하고 자녀들이 성공하며 재산도 늘어나 복되게 살 것이고 죽으면 천당에 가리라 생각했는데 우리가 고통을 겪어야만 한다니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신 그런 고통의 길을 우리가 걸어가야지만 우리도 영광스럽게 된다는 점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고통의 길을 통해서 세상의 질서를 회복하시고 역사를 바꾸신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도 그렇게 할 때 우리 자신도 빛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정신이 없다면 성체를 아무리 영하고 기도를 아무리 하셔도 예수님께서 그렇게 변모하신 것을 이해할 수 없고 우리가 그것을 체험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에서 영광과 고통의 모습을 모두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인식을 지니고 매일 매일을 살 때 우리는 어렵다고 할지라도 또 아무리 영광스럽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느님을 만나는 순간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자신도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기억되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우리 자신이 하느님을 만난 제단 같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강론 시작에 세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곳이거나 전도서인 코헬렛에서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코헬 1,2)라고 하고 또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코헬 1,9)라는 말씀이 틀림이 없으련만 성경은 백성들에게 새로운 것이 있음을 끊임없이 주지시키고 환기시키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를 보면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보았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신비를 관상하고 느끼도록 우리가 초대받았으며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빛나는 얼굴을 뵈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는 관상으로 또 직접 뵙는 대면으로 자신의 모습이 변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필리 3,21)라는 말씀처럼 우리가 주님의 영광스런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으니 이 세상은 얼마나 복되며 가치가 있는 곳입니까? 그러나 신앙이 없으면, 신앙이 부족하면 이런 변화와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관건은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과 세상에 여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참되게 듣고 바르게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5) 오늘 제1독서에서 다니엘 예언자는 유대 민족의 전통과 하느님께 대한 돈독한 신앙을 간직하기 위해 갖은 박해와 혹독한 시련을 겪으면서도 궁중에서 주는 술과 음식 대신에 채소와 물만 마시는 삶을 살았다고 들었습니다. 이런 절제와 극기 생활이 자신을 정화하는 생활이 되어서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지혜에 능통하게 되었고 상당히 영성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분은 혜안을 갖게 되었다고 하는데 우리도 세상 삶에서 좋은 것을 먹고 마시고 입고 누리는 삶에서 벗어나 정화의 삶을 통해서 깨끗하게 되었으면 합니다. 그럴 때 우리도, 지금 여기에서, 주님의 변모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이번 주간에 주님을 새롭게 뵙게 되기를 바라고 빕니다.